-1편 : 한겨울 동짓날 밤의 남태령고개-
겨울은 단조롭고 정적이다.
추워서 야외활동을 거의 안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실내에서 주로 은거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어떤 등신(?) 때문에 참으로 버라이어티 하다.
시국은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잊을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들을 목격해 한편으로는 위안이 된다,
느닷없는 비상계엄과 극우폭도들의 서부법원난입이라는
전무후무한 추태의 발생도 이 기간에 있었지만,
그 반대편에서 각본없는, 미증유의 장면들도 현실에서 나타나 울컥울컥해졌다.
그동안 어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상황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 장면들을 이 겨울에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다.
문득 그 놀랍고 희안(?)한 장면들을 기록해 놓은게 어떨까 하여
뒤늦게나마 이렇게 포스팅 한다.
*농민이 최고야! ㅡ전봉준투쟁단 @남태령 (2분 40초)
일단 아래 영상부터 보자.
한밤중 영하10도, 남태령고개에서의 모습이다.
아니 이 밤중에, 그것도 한겨울 도로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기이(?)한 장면이다.
한겨울 밤, 아스팥트 대로에서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 한다.
'농민이 최고야'라는 곡이 흘러 나오는데(이번에 안 노래이다)
춤추는 사람들은 따악 봐도 농민들은 몇 안되고,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뭔가 비상식적이고 그로데스크한 장면이 한겨울 밤에 펼쳐졌다,
미쳤나? 그래 이날 밤 사람들을 미쳤던(?)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한다.
도농과 세대를 초월한, 서로의 온기로 한겨울을 이겨낸 남태령의 밤.
이날 밤의 연대는 전설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나 역시 평생 가슴에 남을 장면 중의 하나이다.
2024년 12월 21일 한밤중.
서울사람들도 걸어넘어간 적이 거의 없는 남태령고개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소식을 밤 10시쯤 듣고 현장실황 유튜브라이브를 보니
수백명이 있었고, 밤이 깊어감에도 사람들은 더 늘어갔다.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오다가 남태령고개에 막혀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그들을 통과시켜주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막차를 타고 대부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오판,
안정적으로 수천명의 시민들은 농민들과 함께 하며,
서로들 의견을 나누고, 춤추고 노래하며, 추운 겨울 밤을 보냈다.
대부분의 라이브는 슬쩍 보다가 끄는게 정상인데
그 장면장면들이 이상하게 감격스러워 새벽까지 봤다.
*'남태령 대첩' 만들어낸 연대의 힘 - 뉴스타파" (6분 12초)
-아래 영상을 보면 대충 경과를 알 수가 있다.
원인과 진행과정이 간략하나마 체계적으로 담겨있다.
텍스트보다는 영상으로 보아야 현장분위기를 더 잘 알 수가 있다.
전국농민회(전농) 전봉준투쟁단과 밤샘농성을 한 시민들은
일단 농부들과 트랙터를 사당역 인근까지 넘어가게 했다.
(위 영상의 2분 20초~3분 10초)
남태령을 넘는 한밤중의 그 행렬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날이 밝고 첫차가 다니자 사람들은 더 불어났고,
마침내 수만명의 시민들이 남태령과 사당역 사이에 모여 집회 후
농민들의 트랙터가 한남동 대통령관저 부근까지 진출하게 만들어주었다.
자발적 시민들이 이룬 연대의 승리였다.
이후 사람들은 이것을 남태령대첩이라고 불렀다.
*[시사싱글앨범] 남태령 농민가 (2분 19초)
-기존의 곡은 아니고, 나처럼 그 날의 감동을 못이긴 사람이
급히 노래를 만든 것 같다.
연대의 발길은 그렇게 1박 2일. 28시간 만에 막혔던 남태령은 뚫었고,
한남동 집회까지 열어준 후 돌아가는 농민들을 뜨겁게 환송해줬다.
그날밤 자발적으로 철야농성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세대였고,
대부분 노년인 농민들은 이 경이로운 풍경에 어쩔줄 몰라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나중에 한 농민은 후기로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고 썼다.
비록 유튜브로 본 상황이지만 그날 밤의 풍경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감동이었다.
결과는 대첩이라고 할만큼 놀라웠지만
일견 황당스럽기만 한 현장이었다.
우발적인 상황이라 체계나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마음가는대로 움직이는 인내와 연대의 힘으로 버틴 밤이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다 보니 시민자유발언이 주를 이루었고,
진행은 굉장히 난삽하고 투박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트랙터 삽(무대가 없어서) 위에 올라가 발언을 하는데
마치 노변정담, MT에서 라이프스토리를 이야기 하는듯 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닌데 참 조근조근, 진솔하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 소박하고 정겨운 발언들이 나를 이상하게 빠져들게했다.
*감동!여학생이 오타쿠 생일파티중 남태령으로 급하게 달려온 이유ㅠ (3분 54초)
그리고 지루하거나 몸이 굳으면 춤추고 놀았다(?).
이게 그 긴 긴 겨울 밤, 남태령의 추운 날씨를 이겨낸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날 밤 남태령의 기온은 영하 8도였다.
어쩌면 그리 지치지도 않고, 에너지가 넘치는지 감탄스럽기만 했다.
아무 것도 없는 남태령고개, 겨울 한밤중의 싸늘한 아스팥트를
그들의 열정은 이렇듯 뜨거운 열광의 밤으로 만들어 버렸다.
참으로 진기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현장] 소찬휘 '티얼스'는 한밤 남태령에서 불러야 제 맛 (1분 26초)
그날밤 그곳에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
*남태령에서 밤 샌 후기(출처: 더쿠)
https://theqoo.net/review/3541813995
더쿠 - 남태령에서 밤 샌 후기
2024년 12월 21일 저녁부터 22일 아침까지 남태령의 기록 12월 3일 계엄이 발표되던 날, 나는 그 사실을 다른 친구에게 전하며 메시지 앞뒤로 [ㅋㅋㅋㅋㅋ]를 붙였다. 시간을 되돌려 2022년 10월의 그
theqoo.net
12월 3일 계엄이 발표되던 날, 나는 그 사실을 다른 친구에게 전하며 메시지 앞뒤로 [ㅋㅋㅋㅋㅋ]를 붙였다. 시간을 되돌려 2022년 10월의 그 날에도, 나는 사람들이 쓰러진 동영상을 보고 왜들 저러냐고 웃었다. 나는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나서야 당시에는 파악하지 못했던 상황을 인지했고 그제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항상 퍽 늦되었다.
우리 집은 국회까지 차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3일 새벽, 나는 나갈까 말까 갈팡질팡 하다가 침대에 깔아둔 온열매트가 너무 포근하고 품에 안긴 강아지가 따뜻해서였는지 그냥 스르륵 잠에 들었다. 아니 나는 사실 거기에 가서 차를 댈 곳을 찾을 생각에 골치가 아팠을지도, 귀가해 다시 샤워할 일이 귀찮았을지도. 그런 마음을 합리화하려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내가 가도, 가지 않아도 상황은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아무 힘이 없다고.
무력했던 밤들이 지나고 나는 계속 어떤 가책을 느꼈다. 금방 갈 수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2차 계엄을 막기 위해 칼바람이 부는 국회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걸 인터넷으로 보았다. 그래도 나는 나가지 않았다. 밖은 춥고 낯설고 안은 자꾸만 내 발목을 잡아끌기에.
12월 7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국회로 나갔다. 이유는 단순했다.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간 친구와 피켓을 흔드는 동안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덜지 못했다. 혼자서 식당에도 잘 가고 공연장에도 잘 가면서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 다시 만난 세계를 화음 넣어 따라 불렀다.
21일에는 친구들과 이른 점심을 먹고 함께 집회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나는 조금 늦잠을 잤고, 꼼꼼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사탕 몇 개와 바닥 깔개만 챙겨들고 서둘러 나섰다. 식사로는 하이디라오 훠궈를 먹었는데 생전 처음이었어서 꽤나 즐거워하며 먹었다. 그 자리에서 집회에 가지 못하는 친구에게 빌린 응원봉을 들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잠시 커피를 마시는 동안 트랙터 시위가 가로막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민원글을 복사해다 올리며 아마 상황이 곧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몇 주간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윤석열은 퇴진하라! 하는 구호를 외쳤다. 중간중간 훠궈에 든 기름 탓인지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고작 몇 시간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일곱 시 경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친구와 헤어져 핸드폰을 보며 남태령의 상황을 보았다. 깨진 유리창을 보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어가 기다리는데 오고 있던 버스가 눈 앞에서 우회했다. 나도 우회해 지하철을 타러 갔다. 잠깐이나마 자리를 지키자고. 계속 안 했으니까 이번엔, 하면서. 핸드폰 배터리는 고작 20% 정도 남았고 갖고 있던 핫팩은 행진중에 추워보이는 사람에게 모두 주었어서 나는 정말로 두어 시간 정도를 보내다가 집에 돌아가 강아지들에게 저녁밥을 주고 산책을 시킬 생각이었다.
남태령역에 도착했을 때 역 안은 퍽 한산하여서 나는 조금 불안했다. 2번 출구로 나와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동안 소리도 들리지 않고 보이는 것도 없었다. 다만 도로에 차가 다니지 않았기에 내가 맞게 가나보다 하고 계속 걸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해 다가가자 거기에는 저체온증으로 쓰러진 농민 분이 계셨다. 누군가는 “의식을 잃었다고!” 하고 경찰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핫팩이며 담요를 가져다 그 분을 덮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는 낮 열두 시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 느끼는 두려움이 솟았다. 저 사람이 죽으면 어떡하지. 죽으면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를 둘러싼 몇몇이 필요한 인원 말고는 돌아가달라고 했고 나는 이상한 박자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스피커 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숱하게 사진이 찍힌 그 박살난 트랙터 문의 유리조각을 밟고 도착한 시간은 저녁 여덟 시였다. 집까지 가는 막차 시간을 확인하고 앉아 빌린 응원봉을 흔드는데 다른 시민이 다가와 응원봉 불을 꺼달라고 했다. 집회로 몰리면 안 된다고. 그렇게 불 꺼진 응원봉을 들고 있을 때 누군가 와서 도와달라 외쳤다. 구급차가 왔는데 경찰들이 차를 빼주지 않는다고. 단숨에 앞쪽에 앉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고 경찰은 슬금슬금 차를 뺐다. 겨우 들어온 구급차에 그 분이 실려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사람들은 도로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무대로 쓰이는 트랙터가 보이는 방향으로 맨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있었다. 거기에 앉아있다보면 누군가 달려와 무슨 일이 날 것처럼 말하는 소리가 파편처럼 들렸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물대포를 쏠 지도 모른다고 웅성거리기도 했다. 하필 면 추리닝을 입었는데. 젖으면 엄청 춥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래와 자유발언이 이어졌고 일어나서 체조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경찰 버스에서는 해산하라는 방송이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열어라- 차 빼라- 하는 구호를 연호했기에 나는 그 방송에서 뭐라고 떠들어댔는지 아직도 다는 모른다. 내가 들어왔던 길은 이미 막혔는지 경찰차가 가로막은 반대편에서도 차 빼라- 는 구호가 계속 들렸다.
열 시쯤에는 집에 가야지, 했는데 막차를 타야지, 하고 계속 앉아있었다. 농민 분들이 트랙터에 올라가 “같이 밤 새주실 거죠?”라는 말보다 “먼저 가시는 분들은 미안해 하지 마시라”는 말이 더 무거워서 그랬던 것 같다. 발언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생일카페에 가기 위해 나왔다가 이리로 왔다는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도 있었고 데이트하러 나왔다가 이리로 왔다는 얇은 코트를 입은 남자도 있었다. 트랙터에 올라간 것이 신이 난다는 소녀들도 있었다. 나는 응원봉을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나 조리있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고작 경찰 버스로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니 점점 눈물이 늘어서 몇 번은 울컥하기도 했다. 투쟁!
사회 보시는 분이 “막차가 끊겼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환호했다. 막차가 끊긴 게 좋아서 그랬겠나.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는 오기였지. 나눔 받은 핫팩을 무릎에 비비며 버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보조배터리를 사러 나가려는데 아까 올라왔던 길목마저도 경찰 버스로 막혀있었고 경찰들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다시 들어가지 못할까 싶은 생각에 도로 들어가 앉았다. 그때부터는 죽과 빵과 음료수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아직 버틸 만해서,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먹지 않았다. 다들 그런 생각이었는지 음식은 계속 뒤로 넘어갔다.
내 앞과 옆에는 대학 동문인 듯한 친구들이 앉아있었는데 그들에게 부탁해 배터리를 조금 충전한 사이에 낭보가 들렸다. 경찰이 차를 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는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앉았던 자리를 정리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바닥의 쓰레기들을 주워 모았다. 나는 집까지 가는 심야 버스가 있는 것을 보고 그래도 집에 가서 잘 수 있겠구나, 했다. 나는 기념 삼아 트랙터 사진을 몇 장 찍고 가방을 챙겼다.
고작 몇 미터를 가서 우리는 멈춰섰다. 경찰이 이제는 사당에서 길을 막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화가 났지만 폭도가 아니었다. 다시 자리를 정비해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식들이 정말 물 밀듯이 도착했다. 피자, 햄버거, 김밥……. 고기국수며 쌀국수처럼 뜨끈한 음식들도 잔뜩 와서, 어떤 시민은 일어나서 먹방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된 걸 먹었다가 배탈이 날지도 몰라 불안해서 콘치즈 페스츄리를 하나 받아서 먹었는데 그걸 먹었더니 몸에 피가 돌아서 조금 더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옆에 앉은 사람을 흘긋 봤는데 핸드폰 화면에 보이는 색이 익숙해서 혹시 더쿠 하시느냐고 물었다. 아는 체를 하고 싶거나 친목을 하고 싶어서는 전혀 아니었고, 단지 너무 외로웠다. 너무 춥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짧게 몇 마디를 나누고 나란히 앉아서 응원봉을 흔들었다. 그녀의 존재가 내심 든든했다.
그때부터는 서서 몸을 움직였다. 얼어붙은 다리와 앉아있느라 굳어버린 골반이 욱신거려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바위처럼에 맞춰 율동을 하기도 하고 아무 노래에나 춤을 췄다. 자꾸 들어오는 핫팩을 들고 뒤에까지 가서 전달하기도 했다. 트랙터 무대에 올라선 농민은 “여러분께서 지금처럼 여덟 시까지만 버텨주시면!” 하고 호소했다. 그 말을 하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나서 마음이 아팠다. 첫차가 뜰 무렵이면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래도 가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그 시간에 사람들은 우르르 집에 갈테고 그러면, 여기가 텅 비어버리면, 저들이 원하는 것처럼 규모가 줄어들까봐. 해가 뜰 때까지는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다섯 시가 조금 지나 화장실에 갔는데 이미 역 안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데군데 핫팩과 마스크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통제로 역 안의 남자화장실도 여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들에게는 밖으로 나가 다른 화장실을 이용해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큰 소리 내지 않고 돌아서는 모습에 또 조금 감격했다.
화장실을 쓰고 나와 맨 뒤로 가자 인원이 많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마음이 불안했다. 응원봉을 이 손 저 손으로 갈아 쥐며 계속 흔들었다. 목이 아파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려서 더 춤을 췄다. 얼마나 지났을까. 뒤를 돌아보자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한 줄씩 더 길게 늘어서는 것 같았다.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먼저 떠나는 더쿠 친구와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를 외치며 이별하고 해가 뜨는 걸 바라보았다. 이제 세상은 환했다. 함성은 더 젊고 강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들어섰다. 핫팩과 물이 잔뜩 쌓여있어서 또 울컥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내 편한 침대에 누워서 밤새 보지 못한 핸드폰을 보았다. 밤새 함께 투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늘은 죄책감 없이 볼 수 있었다.
계엄 이후로 부모님과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내 부모는 2찍이었으므로. 혹시나 아직도 윤석열을 지지하고 있을까봐 그 사실을 알기가 두려워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 22일 저녁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이렇게 연락이 없느냐고, 잘 지내고 있느냐고. 전 같았으면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어갔을 텐데 왜인지 그게 잘 되지 않아서 나라가 이 모양이라 잘 못 지낸다고 해버렸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제일 무서워하던 말을 쉴 새 없이 했다. 그럼 종북 빨갱이당을 찍으라는 거냐. 이거 그런 계엄 아니다. 우리는 광화문에 나간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 엄마 아버지는 그렇게 사시라고, 나는 그런 엄마아빠도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비웃었다.
야,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엄마는 모른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나 같은 애 백 명, 천 명, 만 명이 뭘 할 수 있는지. 그런 애들이 십만 명, 백만 명이 모이면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좋아하던 노래 중에 “난 비록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다네”라는 가사가 있다. 그 길던 밤은 내가 강한 우리를 확인한 밤이었다. 난 비록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다. 그래서 나는 강자의 편에 설 것이다. 우리가 모이면 약한 자는 이제 없다.
*응원봉 물결친 남태령의 밤…난 농사를 더 열심히 짓기로 했다(출처 : 한겨레신문)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74835.html
응원봉 물결친 남태령의 밤…난 농사를 더 열심히 짓기로 했다 [기고]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 등을 몰고 상경 시위에 나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전봉준 투쟁단’은 지난 21일 밤 경기도와 서울을 잇는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다.
www.hani.co.kr
21일, 수원의 아침은 몹시 추웠다. 전남 구례에서 올라온 트랙터 한 대는 눈길 가파른 경사로 발판을 내려오다 전복되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출발 전에 “가자 서울로, 윤석열 체포하고 농민헌법 쟁취하자”고 앞에서 외쳤고 뒤에서는 “혹시 경찰이 막으면 남태령일 거야”라고 누군가 말했다. 트랙터는 총 37대였다. 나는 앞 트랙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뒤 트랙터에 밀려가는 것 같았다. 중간에 잠깐 쉬면서 생밤 몇 개를 나누어 먹었다. 트랙터 속도는 느려졌고 드문드문 경찰이 보였다. 이제 막는구나, 생각했다. 남태령이었다.
몇몇 시민은 스케치북에 ‘멋져요, 파이팅’을 적어와 응원했다. 지나는 길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약간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 차 안에서 박수치는 사람. 차 안에서 손가락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편에서 보는 사람들은 저편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인데, 만난 일 없고, 만날 날 없을 텐데, 같은 고장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경찰의 진은 남태령을 넘어서 경사면에 위치했다. 오후 2시였다. 서울로 가는 차선과 서울에서 나오는 차선에는 중앙분리대가 없이 30cm 높이의 보도블록이 경계선을 만들고 있었다. 성질 급한 트랙터 한 대가 그곳을 넘어 반대 차선으로 뛰어들어 세 대가 연달아 경찰의 저지선을 넘었다. 경찰은 반대 차선도 차벽으로 급히 막았는데 네 대는 이미 현장을 벗어나 동작대교와 반포대교로 진출했다. 그들은 막힌 자리에 트랙터를 놓고 돌아와서는 ‘대열을 이탈하니 경찰도 막지 않고 갈 데가 딱히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남태령 양방향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첩첩산중이며 고립무원이며 진퇴양난이며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남태령은 대열이 살거나 죽을 자리였다. 오후 해가 가파르게 졌다. 령은 양쪽 높은 봉우리 중간에 있었다. 령은 서울의 길목이며 산을 낀 수도방위사령부 철책은 삼엄했다. 그곳이 1980년에 노태우가 사단장이었다는 사실, 이번 쿠데타에서는 지하 벙커에 잡아온 정치인을 가두려고 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는 계속 고팠다. 빵과 떡이 일부 돌았으나 그것도 바닥났다. 인근에 상점은 없었다. 령을 넘어가려는 바람의 숨소리는 거칠어서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않고 트랙터에 안에서 시동을 켜놓고 시간을 보냈다. 내 트랙터는 히터가 나오지 않았다. ‘아 여기서도 춥고 배고픔에는 계급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저녁 7시쯤 경찰 10개 중대가 견인차, 지게차를 앞세우고 진압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경찰이 들어내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끝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트랙터를 견인하려면 기어를 빼야 하는데 기어를 넣은 상태에서 열쇠를 빼면 그들은 바퀴가 구르지 않는 트랙터를 사지를 묶어 끌고 가야 한다. 그러면 클러치 박스와 미션이 다 아작난다’고 누가 말했다. 일부는 그렇게라도 버티면서 진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자가 트랙터에서 시동을 끄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회의가 열렸다. 현재 상황은 진(進)의 길은 없고 퇴(退)의 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하듯 간부들은 명분과 현실 앞에서 흔들렸다. 오히려 간부가 아닌 사람들이, 평소에 조용한 사람들이, 간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아따 눈들이 많은디 여기서 우리가 빠지면 쓰겄는가, 쪽팔리게.” 그것은 명분도 실리도 아닌 체면과 양심이었다. 죽되든 밥되든 버틴다고 결정했다.
따뜻한 떡볶이가 왔다. 시민이 보내준 것이라고 했는데 두 그릇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김밥이 왔다. 있을 때 먹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먹었다. 핫팩이 왔다. 핫팩에는 군인이 근무를 서는 사진이 있었다. 여기가 그들이 지키는 고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저녁이 되어서 시민들이 모두 자리를 뜨면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언론이 없을 때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여덟시가 지나자 광화문에 있는 시민들이 여기로 올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았다. 늦은 시간에 누가 온다는 것은 우리를 구하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아홉시가 되자 트랙터 옆에 삼삼오오 사람이 보이더니 점점 사람이 많아져서 앞사람은 앉으라더니 더 큰 앰프를 행사장에 가져온다고 말하더니 노래가 나오고 사람들이 미치고 노래는 더 커지고 저녁 10시가 되자 대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제 사람들은 한 5천명, 아니 만명, 숫자는 가늠되지 않았다. 꾸역꾸역 느릿느릿 무장무장 밀물이 뭍을 압박하듯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곳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열한시면 지하철이 끊긴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바람 차가운 령에서, 군인들도 서 있기 어려운 이 추운 고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버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10시가 넘자 사회자가 걱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곧 지하철이 끊기면 이곳은 올 수도 없고 나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어찌합니까?”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던 것 같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데 혼자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밤샘 농성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응원봉이 바다를 이루었다. 바다 빛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였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였고 파란빛, 빨간빛, 노란빛이었다. 손잡이 길이도 짧은 것과 긴 것이 있었다. 물어보니 가격도 달랐다. 왜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고 웃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통계를 확보하기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물어보았다. 최저 가격이 3만원이었고 최고 가격이 10만원이었다. 그들 대개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었는데 모르는 노래가 없었고 지칠 줄 몰랐고 준비성도 좋아서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와 방한 숄더, 돗자리와 장갑, 작고 엷은 이불로 몸을 감쌌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유심히 들었는데 ‘티어스’와 ‘밤이면 밤마다’ ‘여행을 떠나요’ ‘남행열차’ ‘질풍가도’ ‘다만세’와 로제의 ‘아파트’와 윤수일의 ‘아파트’와 BTS 등을 불렀고…. 여기에 적지 못한 노래가 더 많다.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도 불렀는데 기가 막힌 것은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친다는 것이었다. 가사와 가사 사이, 시로 말하면 1연과 2연 사이에 불과 1, 2초 간격에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과 ‘차빼라, 차빼라’를 떼창했는데 원래 그 노래에 그 가사가 생겨먹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회 사회자라 하기는 어렵고 무슨 DJ라고 해야 할 주관자는 노래마다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떼창을 유도했는데 실로 이것은 경이로운 사태였다. 그들은 밤새웠고 그것을 보는 농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보고 싶어서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의 나락이 160개의 알곡이 되는 일보다 놀라웠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추고 말하고 한숨 쉬고 야유하고 환호했다. 처단할 것을 결의하고 울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들은 순서대로 발언대에 올라 3분을 말했는데 그러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렸다.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 초등학교 교사, 농업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광주에 사는 롯데 팬, 전라도 혐오 때문에 괴로운 대학생, 이번에 수능을 본 재수생, 자신이 농업지대에 산다는 학생, 부산에서 주말마다 올라온다는 24살 여성, 수방사에서 군인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둔 직장인,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여성, 대학을 가기 위해 뒤늦게 수능준비를 한다는 30대 여성, 취직이 걱정인 4학년 여학생, 대학 총학생회 활동을 하는 성소수자 남성,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당한 친구를 둔 여성, 양평에서 아버지가 농사짓는다는 직장인을 따라온 양평에서 혼자 농사짓는 여성, 농민운동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연단에 선 고 신용범의 딸 신우리, 집회장의 천연기념물이 되었다는 20대 남성,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노조운동을 한다는 21살 여성 등이 말했다. 그들의 말잔치는 끝이 없었고 박수의 가열참은 겨울 공기를 뚫었다.
농민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양곡법을 거부한 것에 분노한다고, 국산 쌀밥 먹는 경찰은 부끄럽지 않냐고, 국민의힘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이제 깨진다고, 민주주의는 광장에 있다고,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전봉준 티셔츠를 입고 다니겠다고 말했는데 집회 때마다 큰 소리로 현 시국을 개탄하는 민주단체 지도자들보다 말을 잘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으로 자신들이 할 말을 적어왔는데 발언의 마무리를 구호로 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처럼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라가 부끄러웠고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를 잊을 수 없다. 민중가수 최도은은 활화산이었고 불화살이었다. 최도은은 음악도 없이 불나비를 불렀는데 입때껏 그런 날 것 같은 포효를 본 적 없다. 맥박도 핏줄도 터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농민가’를 떼창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몇 사람 깨워서 서울로 향했던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진리와 죽은 자가 갔던 길과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산자의 길을 생각했다. 우금치에서 죽은 자의 몸 위에 포개진 산자의 몸과 80년 5월27일 전남 도청의 ‘동호’의 마지막 밤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
나는 연민과 분노를 생각했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농민, 특성화고 출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마음,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의 마을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보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 자리에 왔다고 굳게 믿었다. 죽은 자가 산자의 길을 열었다고 믿었다. 하늘의 별이 된 그들의 영혼이, 배에 남긴 마지막 손톱자국이,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지상에 내려와 응원봉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달라야 한다는 다짐들이 저들의 가슴속에서 분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찬 바다에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겨울 하룻밤이 무슨 대수냐며,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간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태령에서 여명을 보았고 승리를 확신했고 세월호의 부활을 보았다. 그 후로부터는 경찰벽을 넘는 것도, 한강을 넘은 것도, 윤석열 자리의 턱밑까지 압박한 것도 이미 되어질 길이었다.
체면과 양심이 대열을 분산의 길에서 구했고 연민과 분노가 트랙터의 길을 열었다. 나는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남태령 대첩]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 시위, 잊지 못할 장면들 (13분 38초)
-1박 2일 중계한 유튜브라이브가 여럿 있는데 너무 장시간이라
그나마 적정한 시간으로 압축한 유튜브 영상 하나를 링크한다.
-실시간으로 본 감동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보니 뭉쿨해 진다.
-그날 밤 고생한 모두들 너무 멋있었고, 정말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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