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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1980년 5월의 광주 : 나는 그곳에 있었다

리매진 2020. 5. 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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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그렇겠지만 세월따라 기억은 희미해지고, 과거의 많은 것이 잊혀진다.
더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언젠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때를 한 번 기록해 보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못했다.
이 기록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사람의
지극히 단편적이고 개인적인 일상의 회고이다.

 

1980년 5월 야외시화전 하던 교정의 학생탑앞에서 친구(최동호)와 함께

 

       *5월 1일 : 광주일고 개교기념일
개교60주년 행사로 학교는 들썩거렸다.
기념식과 동문선배들의 체육대회가 있었고
우리는 야외시화전 등의 행사를 했다.

중간에 단절이 있었지만 우리 써클 원시림의 전기멤버였던
윤재걸(동아일보해직기자. 한겨레신문 창간멤버) 선배와
선경식(유신헌법반대로 투옥. 나중에 국회의원) 선배 등 몇 분이
우리를 근처 궁전제과로 오라고 해 빵을 사주셨던 기억이 난다.

남자들만 있던 고등학교에 여학생까지 와 있으니
어린 마음에 무척 신나하고 유쾌해했던 것 같다.
더없이 좋은 날씨에 시끌법적했던 봄날의 한 가운데.
생각해 보라. 남녀고등학생들이 깔깔대고
하늘같은 선배들과 으쌰으싸하던 봄볕의 교정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광주의 1980년 5월 첫 날은
그렇게 싱그럽고 밝은 가운데 시작되었다.

 

광주일고 56회 졸업앨범 핸드폰 촬영
학교교지 핸드폰 촬영

 

        *5월 2일 : 제14회 대통령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당시의 고교야구는 지금의 프로야구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야구 시즌이 되면 도시 전체가 술렁거리고
우승을 하면 도청 앞에서 환영식과 카퍼레이드를 해 줄 정도였다.
그런 고교야구 최절정기에 우리 학교가 그해 첫 대회에서 우승을 해냈다.
우리 동기인 선동열이 최우수선수가 되고,
전문가들은 그 해 몇 관왕도 가능하다고 했다.
광주는 그깟 고교야구가 뭐라고 잔뜩 기대를 걸고(지금 생각에는 우습지만)
다들 희망과 긍정의 부푼 가슴을 간직하며 지낸 것 같다.
서울에서, 대학가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있었지만
우리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즐겁기만 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승 환영식은 도청앞이었고,
카퍼레이드는 금남로를 따라 이루어졌으며,
선수들이 탄 지프차는 군부대지원 차량으로 군인들이 운전하였다.
환희의 그 현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스란히 비극의 현장으로 바뀐다.

 

환영인파가 옥상까지 올라간 건물이 518때 시신이 모인 상무관이다

 


         *5월 18일(일요일)
고3이여서 학교도서관에 갔다. 날씨가 무척 좋았던 날이라 기억된다.
점심을 먹은 후 공부하기도 싫고 나른하여
슬슬 광주의 번화가인 충장로로 산책을 나갔다.
학교가 시내에 있어 중심가까지 쭈욱 걸어가면 1Km 정도이다.

 

걸어가다가 충장파출소(첨부지도 1번) 앞에서 시위현장을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한바탕 시위가 지나가고 소강상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남대생들이 오전에 학교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시내진출을 하여 이곳에서 가두시위를 전개했다고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시위진압을 전투경찰이 했던 것 같다.
진압대 맞은 편에서 구경하는데 경찰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메가폰으로
해산종용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한게 뚜렷하게 기억난다.
"계엄군이 투입되었으니 빨리 해산하라"
나는 그때 진압경찰과 계엄군의 차이를 몰라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진압복을 입은 경찰이나 군인이나 언뜻 보면 비슷하고,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생각.

 

당시 내가 움직인 지도. 따로 쓴 글자와 숫자는 본문 중 일어났던 사건의 장소이다

 

이후 이곳에서는 크게 붙지는 않았던 것 같고,
나는 계속 충장로 우체국까지 시내구경을 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학교에 돌아오니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내가 시내구경을 하는 동안에 시위대와 계엄군이 맞붙어
우리 학교 앞까지 들이닥쳤던 것이었다.
시내에서 밀린 시위대들이 근처에서 계엄군과 격돌하다가 우리 학교쪽으로 도망오고,
계엄군이 수색하며 그 근처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었다.
계엄군들은 막무가내로 사람들은 구타하며 잡아가고
학교 앞 가게에까지 들어가 들쑤시고 휘젓고 다니는 실상을
학교에 있었던 애들은 다 보았다고 했다.
이때 투입된 계엄군은 나중에 알고 보니 공수부대였고
수창국민학교(첨부지도 2번) 부근에서부터 밀고 들어왔는데
진압작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만행이었다.
투입 전에 이들이 마약을 했다느니
며칠간 굶겨 이성을 상실하게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이니...
진짜 그런 것인지 아닌 것인지 모르지만
어쨋든 그날 오후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은 광주의 5월을 바꾸어 놓았다.
그렇게 광주의 참상은 시작되었다.

-자료사진은 인터넷에서 수집한 것으로

 내가 목격한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5월 19일(월요일)
하복을 입는 첫날이었다.
학교는 술렁거렸고 시내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도 나가야 하니 어쩌니 하는 가운데 수업거부를 하려하다가
학생회(당시는 학도호국단) 임원들은 교장실에 끌려가 갇혔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어서 교장실 응접의자에에 옹기종종기 모여있었고,
교련선생과 체육선생들이 문 앞을 지켜 못나가게 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들도 군사교육을 받았고, 학교의 완력 쓰는 일은 주로 그분들이 했다)
그때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이 탈렌트 이효춘의 아버지인 이대로 선생이었는데
딸인 이효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간을 떼우고, 동요하지 못하도록 회유를 하였다.
그러다가 오전인지 오후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하교를 해야했다.
우리가 감금되었을 때 김진원이를 비롯하여 몇 몇이
그냥 시내진출하자고 떠들고 다녔다는데 실행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른 고등학교도 우리와 대부분 비슷한 상황.
그래도 몇 몇 학교는 교내시위를 벌인 것 같으나
우리 학교는 조직적인 시위는 못하고 각자 알아서 시내로 나갔다.
선생님들이 대학생들은 다 잡아가니 교련복 입고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교련복은 대학생이나 고교생이나 비슷하다)

이날부터 시민과 계엄군은 대대적으로 격돌했다.

 

 

 


              *5월 19일~5월 25일
이날부터는 휴교령이 떨어져 등교는 못하고,
하숙집에 있다가 슬슬 걸어 금남로에 나가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하숙집에서 도청까지는 걸어서 2~30분. 2Km도 안되어 더 자주 나간것 같다.
이날부터 완전진압 전날까지는 목격의 정확한 날자를 기억 못한다.
크게 나누면 대치국면, 계엄군 집단발포, 시민군무장, 계엄군 퇴각, 시민해방구로 나눌 수 있는데
내가 겪었던 일이 며칠 날 있었는지 오래된 일이라 구별이 안 됨.
그러므로 이 구간의 서술은 시간 순은 아니니다.


광주역에서 공용터미널(첨부지도 3번) 사이에서 저녁때쯤 시위대를 만났다.
전남대가 광주역 뒤편에 있고, 역전에 광장이 있어서인지
이 경로를 따라 금남로로 시위진출을 많이 했다.
이때부터는 학생들보다 일반시민들이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시위대를 따라가니 나보다 어린 학생이 우리 형을 잡아갔다며
나에게 울분을 토했던게 기억난다.

 

 

수창국민학교(첨부지도 2번) 앞 대로로
갑자기 한 아줌마가 실성하듯 뛰어나와 통곡을 하였다.
땅을 치며 자기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사망소식을 처음 접한 곳이다.

 

 

 

 

시민과 계엄군의 초기 공방은 주로 첨부지도 4번 부근에서 일어났고.
집단발포 전에 서로 대치할 때는 가끔씩 소강상태의 평화(?)국면도 있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계엄군 뒤편의 도청쪽이 궁굼하여
군인들과 탱크 사이를 삐집고 들어가 분수대 쪽을 간 적이 있었다.

아래사진이 거의 그 때 분위기이다.
지금 생각하면 겁을 상실한 행위인데, 기억에 크게 제지를 안받았던 것 같다.
(아마도 빡빡머리 고등학생 한 명이라 무시했을 수도)

 

 

 

기관단총으로 시민을 갈겨 목이 꺽인 것을 보았다.
나는 이것을 처음에는 확실하게 말했는데,
나중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도 햇갈려
이것을 누군가에게 들었나 의심했던 장면이다.
장갑차인가 버스인가에 올라 선 시민이 당한 참상인데
이게 이상하게 나도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뭘 착각했나 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 의문이 이번에 풀렸다.
MBC 5.18 40주년 특집 "나는 기억한다"를 보니
당시 한국일보 취재기자 조성호씨가 5월 21일
"한 청년이 정통으로 이마에 총을 맞고 쓰러지더라" 고 증언했다.
나는 날짜를 기억 못하는데 집단발포가 있었던 날이었나 보다.
나는 목이 꺽여 고꾸라졌다고 했는데 기자는 이마에 맞아 한방에 쓰러졌다고 한 것을 보면,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상황이 틀리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총맞아 죽는 장면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건 외의 사살장면을 내가 직접 본 건 없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
총소리와 함께 계엄군이 몽둥이를 들고 뛰어왔다.
순식간에 도로의 사람들은 흩어지고 나도 주변으로 도망갔다.
(첨부지도 5번부근이었던 거 같다)
어디론가 안으로 들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금남로 주변의 가게들은 모두 철시하여 철제셔터문이 내려져 있었다.
계엄군은 쫒아오고 피신할 곳은 없고
순간적으로 아, 죽나 보나하며 극한의 공포심이 밀려왔던 것 같다.
그때 아주 좁은 골목길이 있어 죽어라 뛰어 거기로 숨었는데
다행히 그곳까지는 계엄군이 오지 않아 잡혀가지 않았다.
상황이 진정되는듯 해 살금살금 전남여고쪽으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 그 기간에 가장 긴박하고 살떨리는 순간이었다.

 

도망 못갔으면 잡혀있는 저 시민처럼 나도 당했을 거다

 

 

대학생들은 다락방에 숨고, 벽에는 솜이불을 둘렀다.
청년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고, 집에도 총탄이 날아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서였다.
그때 나는 광주여고 영어교사이신 박수복선생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하숙집 주인아들이 조대공전을 다니고 있었는데
내 옆방의 보일러실 위 다락에 숨겨두고 길가쪽 벽에는 솜이불로 막았다.
솜이불은 총알이 못 뚫는다는 정보가 있어서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코메디 같은 상황인데 그때는 나름 심각했고,
우리만 그런게 아니라 많은 집에서 실제 일어난 상황이다.
계엄군들이 진입하고 철수하면서 길가의 창문을 열면 총을 쏘아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등장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인지 기억이 안난다.
집단발포후 열받은 시민들이 주변 경찰서의 무기고를 털고,
근처 군수차량생산지인 아시아자동차에서 차량을 탈취해 무장을 했다고 한다.
광주공원에서 예비군들이 사격연습을 시키고 무기분배 등을 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곳에 가 본 적은 없다.
어쨋든 이후 계엄군은 시내에서 철수하고 광주는 해방구가 되었다.

 

 

 

버스, 트럭, 지프차 등 각종 차량에 시민들이 무기와 각목 등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오가고,
도청 앞에서는 날마다 궐기대회가 열렸지만 계엄군이 철수한 시내는 평화로웠다.
특별한 사고를 목격한 적도 없고, 시민들과의 우애는 더 깊었던 것 같다.
하숙집에서도 식사나 생필품 문제로 고민한 것을 못 보았고,
그 많은 시민군들의 먹거리들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오히려 시내에 나가면 이곳저곳에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집에서 밥을 먹고 나와도 되는 거리라 그 유명한 주먹밥을 먹은 기억이 안나는데,
야쿠르트 같은 음료수들은 여러 번 받아먹었던게 기억에 남아있다.
외곽에서는 교전이 벌어질 정도로 살벌했다는데
시내는 그렇게 더없이 평화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너, 나 따지지 않고, 네것 내것도 없는 듯한, 무위의 세계 비슷한 것을 경험했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시내에서만 움직여 도심 이외의 상황을 직접 본 것은 없다.
(첨부지도의 가운데 부분. 따로 글자나 숫자를 표시한 부근에서만 움직였다)
시 외곽 주요도로마다 계엄군과 시민군이 무장하여 대치하고,
교전까지 이루어지는 등 그곳은 살벌했다는데
시내가 평화로워서인지 실감이 되지 않았다.
바쁘게 오가는 시민군들의 차량과 간간히 보이는 헬기에
뭔가가 계속되고 있나 보다 하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광주시 뿐 만이 아니라 전남의 다른 시군은 물론,
전북까지 퍼졌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매스컴은 당연히 보도를 안했고 전화도 여러 번 끊겼던 것 같다)

 

 

 

상무관으로 죽은 시신이 옮겨지고 있었다.
상무관은 도청 맞은 편에 있던 경찰인가 공무원들인가의 체육관이었는데,
이쪽으로 시체와 관들이 집결했다.
나는 실내에까지 들어가 수습하는 장면들을 보다가, 너무 많아 그 수들을 세어보았다.
그때 내가 그 주변까지 세어 본 숫자는 108개.
내가 이 숫자를 기억하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108번뇌네 라고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이다.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게 ,그때 내가 그날 하루 상무관 부근에서만 헤아린게 108명인데,
현재 공식적으로 직접사망자 수 집계가 200명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5월 27일 : 진압된 날
헬기소리, 총소리, 탱크바퀴소리, 확성기 소리 등이 뒤엉킨 어지러운 소음에
선잠을 자다가,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던 새벽쯤에 일어났다..
소란에 창문을 열어 보니 하숙집 문 앞에 거총을 한 군인이 있었고
맞은 편의 근처 가장 높은 건물인 금호장호텔(이름이 맞나?) 옥상에도
군인이 올라가 있었던 것 같다.
하숙집 옥상에도 군인이 있었던 같기도 하는데... 가물가물, 잘 모르겠다.
아래 사진에 내가 서 있는 대문에 총을 든 군인이 있었다(하숙집이 2층 건물이다)
그때 만약 내가 거칠게 창문을 열거나 수상한 행동을 했으면 사살 당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군인이 빨리 들어가라고 해서 피해는 없었다.

 

하숙집. 고3때가 아니고 1학년 때이다. 오른쪽 내가 서 있는 대문 앞에 계엄군이 총을 들고 서있었다

그날 계엄군의 광주탈환(?)작전에서 많은 피해자가 나왔다.

그날 밤 확성기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그것이
계엄군 헬기에서의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한 경고방송인지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구조요청 소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당시 마지막 도청방송을 했던 박영순씨는 그날 최대 볼륨을 올리고
민방위 훈련 때 쓰던 옥외 대형스피커로 절규를 했다고 한다.
그 정도 성능이면 도청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하숙집에까지 도달했을려나?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나오셔서 시민학생들을 살려주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을 잊지 말아주십시요.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나오셔서 시민학생들을 살려주십시오"

 

 

잠결에 들은 소리가 위의 마지막 멘트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희미하게나마 여성의 목소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날이 밝자 어느덧 총소리는 잦아지고, 헬기들만 돌아다니며 선무방송을 해대다가
어느 순간 광주는 무거운 침묵에 들어갔던 것 같다.

 

폭력이 강할수록 시민들은 더 저항했고
피를 보는 순간 더 무섭게 들고 일어섰지만
결국 총칼앞에 제압당했던 가슴 아픈 광주의 5월. 1980년의 어느 봄날.
이렇게 10일간의 광주항쟁은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계엄군의 화려한 휴가(광주진압의 군사작전 명칭이라고 한다)도 끝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의 기억은 신기할 정도로 없다.

나는 진압당한 후 며칠 있다 바로 등교한 줄 알았는데

이번에 확인해 보니 한 달 간이나 휴교를 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의 1980년 5월의 광주는 파릇한 웃음으로 시작하여
유혈이 낭자한 비극의 목격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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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일담

518의 여파로 광주일고 야구부는 6월의 청룡기야구대회에는 아예 출전도 못하는 등
(광주의 참상이 알려질까봐 강제로 출전을 못하게 했다고 한다)
화려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 해 한 번의 우승으로 만족해야했다.

당시 교지와 앨범을 찍으려 다시 보니, 그곳에는 518 관련 기록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것만 보면 그해도 언제나처럼 아무런 일없이 지나간것 처럼 보인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교지와 앨범도 보안부대의 검열후 발간되었다)

 

이후 80년대의 5월은 광주의 참상을 알리고자 하는 전쟁터였다.
해마다 5월이면 광주사태(당시 우리도 그렇게 불렀다) 자료집 발간, 사진전, 비디오상영 등이
각 대학과 종교계의 핵심사업이었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위한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광주의 참상을 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나중에 보니 반 이상은 된 듯 하다.
70년대 이후 사회변혁운동의 가장 큰 고리는 아마도 "전태일"과 "518광주"이지 않나 싶다.

아래 사진은 그 때 만들었던 자료집 중의 하나가 아직 집에 있어, 핸드폰으로 몇 페이지 찍었다.

-내가 관여한 자료집은 아니다.

 

518 당시 시내에 뿌려졌던 유인물들(투사회보 등)

 

518 광주자료집 이야기가 나와 정말 사적인 여담 하나.
(쉬어가는 말랑말랑한 구간)
우리 대학에서도 자료집을 발간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는데
추가자료 수집역할을 광주가 연고인 내게 맡겨졌다.
그래서 광주에 내려가려 강남터미널에 갔는데 여자애 한명이 나를 배웅했다.
우리학교의 내가 예뻐해주던 여자애인데,
나는 예비역이고 그 애는 대학 들어온지 2달 정도인 풋내기(아마 19살이었나)
그때까지만 해도 518추모사업은 보안이고(자료들을 소지하다 걸리면 연행되던 시절)
진행과정은 비밀인데, 어떻게 그 애가 나를 바래다 준다고 왔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그 애를 몇 번 집에 데려다 줄 때 무심코 광주에 내려간다고 했을 듯 싶다.
강남터미널에서 만난 것을 보면 분명 약속을 했을거고,
굳이 그곳까지 나온 것을 보면 기억 못하는 뭔가가 있었는 듯도 싶은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안난다.
그 여자 애는 운동권도 아니고 전형적으로 야들야들한 서울애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친해졌는 지도 모르겠다(연인관계 아님)
어쨋든 그래서 만났는데 황당하게도 엄마와 함께 나온 것이었다(뭐냐???)
당황하여 물어보니 잘 안돌아다녀 지리도 잘 모르고
강남터미널도 처음이라 엄마가 불안하여 동행하자고 했다는 것 같다.
(80년대만 해도 서울여학생들은 공부만 하다 대학에 들어온 애들이 많았었다)
참, 천진난만하다. 그렇다고 자기 엄마하고 나오냐.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 다음부터.
시간이 남아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2층 식당에 들어갔는데
어머님이 식사를 주문 후 우리만 남겨놓고 저쪽 다른 테이블로 가버리신다.
그래서 둘만 한 테이블에서 먹고, 어머니는 저쪽에서 혼자 계시고,
여자애가 나를 전송할 때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는 등 둘 만의 시간을 갖게 하셨다.
나는 계속 당황하는데 그 여자애는 그저 생글생글(애지중지 키운 것 같기는 하다)
지금 생각해도 몸둘 바를 모르는 상황인데 그 애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는지
아직도 궁굼하다(어머니.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여요)
지금은 소식이 끊긴 장*영!  "어머니 잘 계시냐? 나, 그날 많이 당황했다"
엄혹한 그 시기에도 그런 맹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갑자가 눈 또르르 굴리며 배시시 웃던 그 애가 보고 싶네.

  " *영아! 어디서 어떻게 잘 지내고 있냐?"

 

강남터미널에 왔던 장*영. 사진 날자를 보니 그 후 한두달 지난 때인 것 같다.

 

518때 광주에 있었던 우리들끼리는 거의 그때 이야기를 안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내 주변에서는 그렇다.
그러다가 가끔 화제에 오르면 정말 몰랐던 사연들이 펑펑 터져 나와 놀라곤 한다.
다들 접했던 위치가 다르니 수만가지 상황을 따로 목격했을 것이리라.
친구 한명(학교는 다르다) 중 도청에 마지막 날까지 있다가 연행되어
고문까지 당한 애가 있는데, 나는 그 사연을 3년 전에야 알았다.
그것도 본인의 입으로가 아닌 다른 친구의 전언으로.
하긴 나도 물어보기 전에는 잘 안하는 편이니까.
가끔씩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논리로 518를 폄훼하면 그냥 웃는다.
아마도 미약하나마 그날을 관통했던 사람으로서
너무 어이가 없고, 같잖은 소리들이라 상대하기 싫어서 그런 것 같다.


한동안 헬기소리만 들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증상이 있었다.
헬기소리만 나면 자동으로 총소리, 탱크소리, 군홧발 소리 등이 믹싱되어
뒤슝숭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
그리고 도청의 마지막 구조요청 확성기 소리가 들리는 듯 해 안절부절하는 마음.
일종의 트라우마였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내가 518때 특별한 역할을 하거나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없다.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것도 없다.
시민군이 되어 차량에 탑승한 적도 없다.
그래도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해마다 5월이 오면,
남루한 복장에 구식총과 각목 등을 들고 파손된 차량에 시내를 누비던 시민군,
시신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 등이 떠올라 문득문득 울컥해진다.

 

 

 

 


마지막으로 어쨋든 전두환은 능지처참할 살인마입니다.
그때 지휘체계에 있던 새끼들은 다 반성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아직도 거들먹 거리고 있는 몇 놈들은 꼭 처벌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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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2절 : 원곡자 박종화 버전
-518를 소재로 한 노래는 많은데 이런 곡도 있다.
-곡을 만든 박종화씨가 직접 부른 버전이다

 

 

나는 저 길에 서면 분노가 인다
도청앞 금남로에 서면
지금도 짓밟는 군화발소리 불타는 적개심 인다

불덩이로 일어난 전사의 조국사랑이
치열했던 도청에도 비좁은 골목에도
덧 없이 흐르는 길아
금남로도 광장도 굽이굽이 흘러
가슴깊이 스미는 사랑

나는 저 길에 서면 분노가 인다
금남로 한벌판에 서면
지금도 울리는 칼빈총소리
내 가슴에 살아 들린다


          *지리산 : 노래패 소리타래 버전
-제목이 왜 지리산인가 의아해 하겠지만
 원래 이 곡의 1절은 지리산을 소재로 2절은 518를 다룬 것이다.
-이것이 1. 2절 다 있는 풀 버전인데, 들을 때마다 뭉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