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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스스로가 전태일이 되신 이소선 여사

리매진 2011. 9. 9. 00:31

*이소선 여사를 처음 뵙다
80년대 중반 대학시절, 갑자기 선배가 나를 찾더니 따라오라고 한다.
그냥 쫄래쫄래 따라가니 창신동. 골목길들을 돌아 돌아 허름한 집에 도달.
기억에 대문을 들어서니 자그마한 마당이 있는 약간 어둑한 집에 낮으막한 지붕이 있고

가운데에 거실역할을 하는 편상같은 마루가 있었는 듯 싶다.
유아기의 아이들이 몇 명 있고 깡마른 여자가 한 명,
그리고 이미 졸업한 다른 학교의 써클 여자선배도 한명이 있어 놀랐던 기억이.

 

엉거주춤 있으니 저쪽에 계신 어머니뻘 되는 한 분에게 선배가 인사를 하라 한다.
그런데 허거덩 그분이 전태일열사의 어머님이란다.
마루에 있는 깡마르고 안경쓴 여자는 전태일의 여동생이라 하고.
반사적으로 인사를 드렸지만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날 놀랬을까?
전태일열사도 분명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들도 있을 수 있었을텐데....

아마도 우리에게 전태일은 전설이어서였지 않았을까.
서슬퍼런 군사독재시절 구전이나 은밀하게 전해져야 했던 전태일의 일대기와

불온서적으로 떠돌며  저자 조영래변호사의 이름마저 비밀에 부쳐져야했던 전태일 평전.
그는 전설이었고 지금의 체게바라처럼 어쩌면 이상의 저편에 있는 존재라
혈육이 눈앞에 있을거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얼결에 나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여동생 전순옥을 처음 만났다.

 

당시에 그곳에서는 창신동 빈민들의 아이들을 대신 맡아주는
지금의 어린이방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상의 역할은 잘 모르겠다.
그곳이 우리 라인에서 공식적으로 빈민연대할동을 하는 곳이 아니었고
나는 그 때 그쪽 애들이 어린이공원으로 야유회가는 날, 사진도 찍어주고 도와주는 일을 했다
(나중에 보니 연세대 학생들이 대거 와서 도와주는 것으로 보아 연세대가 조직적으로 결합해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가 아닌 스스로 아들이 되신 분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들은 죽고 유신과 독재정권, 그리고 자본의 탐욕이 노동계를 억누르는 야만의 세상,
그러나 경상도 깡촌에서 태어난 무학의 이소선 여사는 그 작은 몸으로 마지막까지 정신줄을 놓치지 않고
분신한 아들을 대신하여 스스로 전태일이 되어 평생을 사셨던 것 같다.

 

이번에 찾아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운 곳까지 그분은 가셔서 위로가 되어준 삶을 살았다.
쌍용자동차나 용산참사처럼 잘 알려진 곳은 물론
잘 모르는 기륭이나 재능교육 등 어렵고 힘든 현장에서는 어김없이 이소선 여사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사진이 참 눈물겹다.

 

 

80살이 넘은 연세에 노구를 이끌고 쌍용자동차 투쟁에 힘을 보태려 가신것 같은데
힘이 없어  이렇게 길바닥에 앉아 계신다.(왼쪽 아래 앉아 계신 안경쓴 분)
그만큼 그 긴 세월을 노동자와 함께 하셨으면 이제 쉬셔도 되실 분인데
없는 힘이라도 끙끙대며 보태려 그곳까진 가신 걸 생각하니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다.
한진중공업 문제로 부산에도 가려하셨는데 결국 건강 때문에 못가시고
그게 안타까웠다고 하시다 결국 이번에 돌아가신 분.

 

자식사랑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누군가는 자식들에게 많은 걸 물려주어 흐믓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거고
누군가는 자식때문에 호위호식하며 자식사랑의 기쁨을 누리기도 할꺼다.

그러나 이분 이소선 여사는 자식의 바른 뜻을 이땅에 실현하는게
먼저 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여겼나 보다.

 

그래서 이제는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닌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어버린 분. 이소선 여사.
가신 그 곳, 다음 세상에서 전태일 열사의 큰 절 받으시고 행복하게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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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의 어머니 이소선(글; 민종덕)

 

남한의 노동운동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 군부독재하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불모지에서

오직 어용노조와 노동귀족이 판을 치고 그들은 자본과 정치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노동자를 통제하고 탄압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이 땅의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으로 항거한 사건은 남한 노동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성장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전태일 분신 항거 사건은 민족 민주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진정한 민중중심의 운동으로 발전시키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전태일은 이웃과 동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했으며,

마침내는 만인을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친 위대한 인물이다.

이 위대한 인물을 낳고 기른 이소선 어머니를 알면 알수록 전태일이 이렇게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한 인물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꼭 적합할 정도로 이소선 어머니의 성품과 가르침 때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을 낳았고, 아들의 뜻을 이어받아 청계피복노조를 낳았고, 자주적인 민주노동운동을 낳았고,

민족 민주주의를 낳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이시다. 그 어머니의 족적을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이하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www.chuntaeil.org/section2/umm/um02.htm

 

1. 어린 시절
2. 밑바닥 인생
3. 큰아들 태일이의 죽음
4. 노동운동가 이소선
5. 연대투쟁의 선봉, 재야민주화운동의 맹장
6. 이소선 어머니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