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쩍슬쩍 보던 영화가 어느 새 자세를 가다듬게 하며,
하던 일을 멈추고 제대로 정주행하게 한다.
추운 겨울 밤 한 가운데, 그 한기보다 더 서늘하게 다가왔던 영화들.
영화를 본 후, 한밤중이라 갑자기 허기져 라면 하나를 끓여 먹는데
면발 사이의 김따라 그들의 모습이 영화처럼 맺혀 울컥했다.
한겨울, 그 냉기보다 더 외로운 삶이 그곳에 있었다.
수십편의 옛날 한국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전편에 이야기 했고,
(1950~60년대 옛날 한국영화를 보다 https://blog.daum.net/lgy6203/250)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 몇 편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어렵게 수집하여 여러 소스들을 짜깁기 하고 보정하며,
마침내 복원본으로 완성했다지만 화질은 굉장히 열악.
그래도 이렇게 나마 볼 수 있는게 어딘가?
화질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개인적으로 좋았던 영화들이다.
*오발탄(1961)
-영화 정보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28#none
-감독 : 유현목 / 출연 : 김진규, 최무룡, 서애자, 문정숙, 윤일봉, 이대엽.
이번에 본 고전영화 중 기존에 본 몇 편 안되는 것 중 한 편이다.
무엇때문에 언제 본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 일인데
그동안 명작이라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생각 안난 작품.
아니 내용이 이 영화 저 영화들과 혼합이 되고,
오발탄이라는 제목과 연관하여 전쟁 씬이 주로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의 오류까지 그동안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보니 남과 북(1965) 등의 당시 전쟁영화들과
그 당시 상이군인들을 소재로 한 다른 영화들 몇가지가 오발탄과 맞물려
내 기억을 그동안 지배하고 있었다.
자세한 스토리나 정보는 아래 링크 주소의 블로그(세라의 만년필)에 가면
스크린 샷까지 포함 되어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보고 오길 https://blog.naver.com/543745/222206275330
모두가 천근만근 되는 짐짝이 되어 인간이 짐짝 구실밖에 못하게 되고,
늙은 패잔병처럼 처절하게 생활의 피를 흘려 본 사람들이
이 넓은 땅덩이 위에 저 혼자만이 서 있는 것 같은 세상.
그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기 싫다는 사람들.
옆구리에 썩은 상처를 부여안고,
고질적인 치통을 참아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삶들.
영화는 지지리 궁상맞은 집안의 가장인 철호(김진규)의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철호는 말이 없다. 그저 인내하고 걸을 뿐.
그 무거운 침묵과 망연자실한 걸음,
복잡미묘한 상황이지만 철저히 감정이 배제된 그의 발길은
더 없이 아리고 허하기만 하다.
가로막은 운명의 장벽. 그러나 그것을 뚫을 수 없는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은 그는
마침내 스스로를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가자 가자를 외치지만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는 사람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어딘지 가긴 가야 할 텐데를 넋두리처럼 외다가
그는 서울의 어두운 밤 속으로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그의 헛한 발길에 무심한 음악과 함께 하는 장면은
영화 전편의 아래 구간(런닝타임)에서 볼 수 있다.
-단조로운 롱테이크의 카메라 트래킹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씬이었다.
(단위는 시:분:초)
00:34:37~00:35:27
01;04:43~01:05:07
01:28:55~01: 30:08
01:33:23~01:36:40
01:38:31~01:43:00
*안개(1967)
-영화 정보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553#none
-감독 : 김수용 / 출연 : 신성일, 윤정희, 이낙훈, 주증녀, 이빈화.
첫 장면부터 계속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하던 방식대로 그냥 한 편을 골라 무심코 보는데
시작하자마자 정훈희의 안개라는 곡이 경음악으로 깔려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고, 나는 이 곡이 70년대에 나왔다고 그동안 생각했는데
이 곡이 이 영화의 주제가였다.
그 후로 안개는 묵직한 섹스폰소리로 영화 내내 자주 흘러나온다.
본격적으로 내용이 전개되는데, 분위기가 슬건슬건 볼 영화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진이라는 단어도 나오고.
어라~ 그러며 되돌려 타이틀부분을 보니, 이게 김승옥 원작이라고 터억 박혀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원작이었다.
어쩐지.... 그렇고 그런 영화 중의 하나인줄 알았는데 갈수록 내용이 좋더라.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본거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윤정희가 나온다.
그동안 본 5~60년대 영화가 대부분 최은희, 도금봉, 김지미 등이 주로 활약하여서
윤정희는 70년대 쯤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등장.
이것도 급히 확인해 보니 이게 그녀의 2번째 작품이란다.
곁눈질로 보느라 놓쳤는데 다시 보니 타이틀백에 윤정희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이렇게 3번의 허를 찔린 채 본 영화. 안개(1967).
지독한 안개에 싸인 무진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의 무기력한 권태와 무채색의 고독, 무료한 일상, 일탈에의 번민이
안개가 온 몸을 휘젖고 다니듯 진득진득 영화에 묻어있다.
화질이 나빠 안개가 잘 표현되지 않고 뭉개지지만,
안개는 흑백화면을 지겹도록 지배하며 몽환처럼 흐른다.
안개는 이 세상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마녀가 뿜어내 놓는 입김과도 같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하고, 사람들을 둘러싸는 것이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는 것이다.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 안개 속에 절망에 빠져 미칠 듯한 마음을 내맡기고,
번민에 휩싸이는 외로운 남녀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펼쳐 더 신선했던 영화.
오열하지 않고 담담하지만 어느새 스며드는 안개처럼 영화는
우리를 그 고독과 절망의 세계로 깊숙히 빠져들게 한다.
어쩌면 시크하고 쿨하게 영화는 끝나지만(런닝타임도 짧다)
장면 내내 따라다닌 무진의 안개는 정훈희의 노래와 함께 계속 우리를 감싸고 돈다.
윤정희의 어설픈 교태를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
어정쩡한 그녀의 눈웃음과 앙징맞은 애교가 적응이 안되지만
그 어색함이 도리어 묘한 매력이 있다. 풋풋한 요염이랄까?
나름 신경쓴 베드씬도 2번인가 나온다.
그나저나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게 되면 낫는다는
무진사람들의 병은 안개를 떠나 치료되었을까?
누구도 사랑해지지가 않는다는 인숙(윤정희)은 다시 사랑을 하였을까?
문득 이 밤, 그 안개낀 무진이라는 바닷가를 한번 가보고 싶다.
무진. 그 도시는 어디일까? 그날도 안개는 낄려나.....
정훈희의 노래는 흘러나올까?
*휴일(1968)
-영화 정보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4891#none
-감독 : 이만희 / 출연 : 신성일, 전지연(지윤성), 김성옥, 김순철.
이번에 본 영화 중 최고의 명작. 단연 최고다.
이런 영화가 그 당시에는 개봉을 못하고 사장되었다가
2005년에야 발견되어 우리에게 알려졌다니.
(검열에 걸려 미개봉. 당연히 영화포스터도 없다)
그녀를 보면 눈물만 난다.
그녀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바람은 왜 그리 부는지. 흙바람은 그 추운 날 왜그리 매섭게 부는지.
저절로 몸이 추워지고 그 쓸쓸함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영화.
휴일은 그저 안타깝고 안스러워 어쩔줄 모르게 하는 영화이다.
아무 것도 없이 허세 뿐인 백수 허욱(신성일).
지고지순한 청순 가련녀 지연(전지연).
그 연인의 가슴 아픈 사랑, 허무와 절망이 황량하고 추운 서울을 배경으로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가슴을 찢어놓는다.
휴일은 그런 어둡고 슬픈 이야기, 낙제된 인생을 비극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자세한 스토리나 정보는 아래 링크 주소의 블로그(조르바의 춤)에 가면
스크린 샷까지 포함 되어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보고 오길 https://blog.naver.com/gozorba/20126187119
언제나 일요일에 만나는 연인.
그러나 빈털리인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찬바람 부는 거리.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지만 세상은 늘 거리에 부는 바람처럼 매정하다.
그 거리에서 그들은 미래를 꿈꾸지만, 바람은 더 매섭게 불어친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청춘의 아득한 절망감.
발 동동 구르며 찬바람에 온몸을 맡기는 그들의 고뇌와 방황을
이렇게 몸서리쳐지게 표현할 수 있는지......
청춘남녀는 휘청거리고 눈은 생기를 잃어간다.
아무 것도 없어 우울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그러나 영화는 굉장히 세련되어 있다. 장면 장면이 에술이다.
그 당시 영화라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카메라워크나 연기가 뛰어나고,
연출도 무척 깔끔하게 했다.
이 영화는 칼러로 찍었으면 이 맛이 안 났을 것 같다.
흑백화면이 주는 분위기와 정서가 영화의 내용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리메이크를 하여 온갖 장치를 동원하더라도이 독특한 분위기와 정서는 만들 수 없을 것 같다.
한마디로 대체불가능한 수작.
위의 장면은 남산에서 찍은 거 같은데 집에서 약 2Km 정도 된다.
집에서도 보이는데 이 영화를 본 후로 남산을 바라다 보면
꼭 그녀가 지금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 같아 한 번 가보고 싶어진다.
가서 말없이 한번 안아주고 다둑여 주고 싶다.
그 흙바람을 막아주며, 조용히 손 한 번 잡아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실컷 울라고,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울라고.......
아직도 그녀의 눈물이 나에게 떨어져 마음 아프게 한다
*수학여행(1969)
-영화 정보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535#none
-감독 : 유현목 / 출연 : 구봉서, 문희, 황해, 장동휘, 안인숙
서해낙도 어린 학생들의 좌충우돌 서울 수학여행기.
내용이 뻔할 듯 하고 코메디언 구봉서가 나와 슬립스틱 웃긴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게 볼수록 재미있다.
그냥 넘길려다 계속 보게 되었는데 갈수록 빠져든다.
예상대로 내용은 유치하지만 이상하게 감칠 맛이 나고,
도식적인 스토리지만 어느새 가슴을 뭉쿨하게 한다.
한마디로 동화다. 정말 아름다운.
마음이 깨끗해지고 순수해지는 기분이다.
모두가 착하고 선하다. 다들 천사같고 인간적이다.
가끔씩 갈등의 국면도 나오지만 언제나 결론은 선하게 진행된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영화가 있다니.
아무 생각없이 힐링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
마음이 따뜻해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지는 영화.
그러고 보니 추천영화 중 유일한 컬러영화다.
컬러지만 오래된 영화라 화질은 별로.
그래도 그 당시의 아름다운 섬풍경은 그대로 전해진다.
(선유도라고 한다)
무공해 청정무구, 천진난만에서 오는 순수, 인간에의 신뢰,
복잡한 세상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싶으면 이 영화를 꼭 한번 보길 바란다.
=======오발탄(1961), 안개(1967), 휴일(1968), 수학여행(1969)======
이 영화들은 앞으로도 가끔씩 생각날 영화들이다. 여러 번 다시 볼 듯.
마무리는 휴일의 OST로 할려했는데( 영화에 깔리는 음악들이 좋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무슨 곡인지 찾아도 보았으나 아무 정보도 없다)
엔딩 음악은 정훈희의 노래 안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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