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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잡설(雜說)

한여름에 다시 본 겨울여자(1977년작)

리매진 2020. 6. 23. 04:26

똑바로 보세요. 선생님. 도망치지 말고요.
인간의 거짓없고 순수한 욕구를 그때문에 억눌러야 할 만큼이요.
왜? 보다 중요한 사실보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만 보려고 그러세요.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그걸 보지 않으려는 바보여요.
왜 진실을 똑바로 보지않고 피하려 하세요.
그건 관습일 뿐이여요. 미각같은 거. 하려고만 하면 길들일 수 있어요.

 

무더위가 다른 해보다 빨리 찾아와 벌써 후끈한 날.
그 한여름 밤에 겨울여자 영화를 찾아봤다.
갑자기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조해일 작가의 별세소식을 들어서이다.

겨울여자는 김승옥 각색, 김호선 감독의 1977년 제작된 
장미희, 신성일, 김추련 등이 출연한 영화다.
조해일의 베스트 셀러 소설 겨울여자를 원작으로 했다.
당시 최인호, 조선작, 한수산, 박범신 등의 감각있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영화화하는게 유행이었는데 조해일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그런 분이 어느새 나이가 들어 며칠 전 다른 세상으로 간 것이다.

 


        *겨울여자 줄거리; 위키백과에서
이화(장미희)라는 소녀는 기독교 목사의 딸로 구김살없이 자라던중
여고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상한 인연으로 한 청년을 알게 되어 연애감정을 갖는다.
요섭(신광일)은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어느날 별장에서
이화를 순간적인 욕구에 의해서 껴안으려다가 강한 거부를 당하고 스스로 번민하다가 자살해 버린다.
이화는 생전 처음 큰 충격을 받아 괴로와하던 차
쾌활한 대학생 우석기(김추련)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이번에는 자진해서 남자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고 마치 모성애를 발휘하듯 남성을 감싸주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남자마저 군에 입대한 후 사고로 죽었다는 비보(悲報)가 날아 든다.
절망에 빠졌던 이화가 세 번째로 만나는 남성은 바로 고교시절의 은사로서
지금은 아내와 이혼하고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허민(신성일)이다.
이화는 허민과도 뜨거운 관계를 맺지만 그와의 결혼은 승낙하지 않는다.
오히려 헤어졌던 여성을 다시 허민과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고는 호젓이 허민의 곁을 떠나가 버린다.

 


"이화는 누구에게나 속해 있고....
또 이화는 아무에게도 속해있지 않다....."
개봉당시 겨울여자는 현대 여성들의 애정 모랄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대담한 소재에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연출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뭔가 불만이 가득하고 일탈을 꿈꾸던 고교시절,
늘 다른 세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숨가뿌던 시절에
이 영화(소설)는 나를 흥분하게 했고,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거기에 이화의 이미지와 비슷한 여자와의 그렇고 그런 관계를 겨울에 유지하다가

이상하게 꼬여버렸던 시기이라 더 그랬던듯 싶다.
(난 그때 솔직히 대학생들의 연애가 부러웠고 그러지 못하는 나이가,
고교생의 한계와 속박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더 이 영화에 집착했던 것 같다.

 

내가 겨울여자란 소설을 책으로 먼저 본건지, 영화만 본건지는 불확실한데
영화를 그 때 본 건 확실하다.
청소년관람불가라서 바로 개봉관에서는 보지 못하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상대적으로 단속이 느슨한 재개봉관인 아세아극장에서 본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영화를 보러 간 게 아니고 이화를 보러 간건지도 모르겠다.
청순가련하지만 당돌하고, 여릿하지만 속깊은 여자.
슬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더없이 해맑은 여자.
여러 남자와 관계를 가지지만 순결한 이미지의 여자.
이화는 정말 영화에나 나오는 캐릭터였고
나를 비롯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 같다.
감수성 충만한 시대에 이런 묘한 이미지에 나는 더 흔들렸던 것 같다.

 

실제로 이화는 천사같은 성녀(聖女)인가 타락한 성녀(性女)인가로 시비가 붙었었다.

새침했던 여자가 몸과 마음을 다 주는, 그러나 불결하지 않게 느껴지게 하는 캐릭터설정이

그 당시에는 거슬렸나 보다.

우리도 이런 화두로 토론 비슷한걸 주고 받은 것 같다.

 


        *겨울여자를 2020년에 다시 보고 나니
장미희는 그때 당시 그렇게 이쁘다고 생각은 안했는데
(왠지 청승맞고 가식적인 느낌이 그때에는 있었다)
이번에 다시보니 말갛게 이쁘다-이화로는 적격이었다.
지금도 나는 장미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데 이번에 다시 보니
이렇게 매력적인 배우였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제목이 겨울여자여서 그동안 당연히 겨울이 주요 배경이라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세밀한 장면은 기억을 못했었다)

이번에 다시 보니 웬걸 겨울장면은 거의 안 나온다.
을씨년스러운 장면이 몇 번 나오지만 겨울스럽지 않고,
눈 한송이나 설경도 한 장면이 없다. 신기할 정도이다.

그런데 제목은 겨울여자이다.

 


겨울여자 OST에서 제일 잘 알려진 "눈물로 쓴 편지"와
가사가 있는 "겨울노래" "겨울이야기" "겨울사랑" 등은 영화 내용과 연관성이 거의 없다.
영화에서 이화가 눈물로 쓴 편지도 없거니와 극중 사랑놀음도 대부분 겨울이 아닌 때 한다.
영화 안 보고 가사만 들으면 온통 영화가 겨울로 도배되었을 듯한 착각을 일으키지만
실상 겨울장면은 거의 없는, 그러나 제목에는 다 겨울이 붙어있는 이상한 영화.
-작가나 감독에게 이게 무슨 의도가 있었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마음이 겨울이어서 그랬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영화를 겨울이 아닌 한여름에 보고 이글을 쓰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서 볼 수 있다.

( www.youtube.com/user/KoreanFilm )

-무료. 의외로 화질 좋다

-다른 옛날 영화도 많이 있다.

 

 

 


참, 조해일 작가의 별세에 그의 제자인 김언수소설가는 이런 조사를 남겼다.
어쩌면 이화와 같은 삶을 살다간 듯 하다, 이분도

 

        *삶을 미화하고 싶지만 선생은 하늘에서 화를 낼 게 뻔하다

"이 세상엔 아직도 울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너무 크게 웃지 말고, 행복을 뻐기지 말고,

성공을 자랑하지 말고, 슬쩍이라도 어두운 곳과 낮은 곳을 살피면서 살아.”

(전문은 이 링크에서 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950489.html )


조해일 선생이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지인과 제자들이 모여 이제 가고 없는 조해일 선생을 두고 뒷담화를 했다. 그의 흉을 보고, 우스웠던 일들과 고마웠던 일들과 섭섭했던 일들을 떠들었다. 덕분에 조금 울었고 덕분에 더 많이 웃었다. 사실 살아 있을 때의 술자리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술자리의 주인이 공기(空氣)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고, 유쾌하고 편안한 공기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제물로 던질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치사함을, 파렴치함을, 잘못된 선택들과 부끄러웠던 과거들을 늘 안주처럼 꺼내놓았다. 우리는 그것으로 선생을 마구 놀렸고 선생은 허공에 팔을 저으며 웃었다.
<중략>

선생이 루저여서 제자들도 루저들만 모여들었는지, 제자들이 못난이들만 있어서 선생도 덩달아 루저가 됐는지 모르겠다. 영화판의 루저, 문학판의 루저, 연극판의 루저, 운동권 루저, 가난한 출판사 사장, 서른 넘고 마흔 다 되어도 정신 못 차리고 예술이랍시고 하고 자빠진 나 같은 못난 제자들이 선생을 찾았다. 이 못난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는 선생이라곤 조해일밖에 없으니까. 선생은 그 못난이들을 일일이 챙겼다. 아무 보람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럽고, 소소하고 하찮은 만남들을 선생은 귀하게 대접해줬다. 그 생산성 없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제자들을 보듬어주고, 일일이 밥을 사주고, 술도 못 마시면서 술자리를 지키고, 용돈을 줬다. 너무 얻어먹은 게 많아 도저히 미안해서 제자가 술값이라도 내려 하면 “너 교수 연봉보다 많이 벌어? 까불지 말고 나보다 더 많이 벌면 그때 술값 내.”핀잔을 주곤 했다.

<중략>

그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살아가는 법을 말했다.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럽고, 실수하고, 상처주고 살아왔다고.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므로 내일은 조금만 덜 부끄럽게 살자고만 말했다.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치사함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비겁함이 있다는 것을 늘 인정했다. 자신의 비겁함과 허약함을 인정하고 또 타인의 허약함과 비겁함을 인정했다.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같은 물방울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내가 미워하고 부정하는 당신도 이 물방울 속에 같이 살며, 그토록 안간힘 쓰면서 이 아슬아슬한 물방울의 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가르쳤다.
그러니 조해일 선생이 떠났다고 기리고 빛낼 것은 별로 없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제 선생도 없이 남겨진 이 많은 루저들에게 술은 누가 살 거냐는 것이다. 누가 그 술값을 내고 스스로를 허물어 술자리의 유쾌하고 편안한 공기가 될 거냐는 것이다.
-김언수 소설가

 


                 *겨울여자 A07 주제음악(C)
-개인적으로 OST에서는 이 곡이 제일 좋다(경음악)
-듣고 있노라면 이화가 많은 것을 뒤로 하고 어딘가로 혼자 떠나는듯 해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