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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추석이 다가오니 문득 큰아버지 생각

리매진 2019. 9. 7. 21:16


우리집의 추석일정은 늘 똑같다.
자식들이 본가에 내려가고, 당일에는 큰집에 간다.
거기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하고
큰집에 다시 가 이른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항상하는 추석의 일정인데 거의 기계적으로 돌아간다.


그 중심에 큰아버지가 있고, 우리집은 순응하며 거기에 동참한다.
우리 아버지가 큰아버지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고,
우리 어머니와 큰어머니도 사이가 아주, 아주 좋다.
동서간에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집안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도 서로 잘하시는 것 같고.
큰아버지는 항상 우리 집안의 중심이었다.


원래 우리 집안의 장남은 미국 큰아버지인데 이민를 가서
자연스럽게 지금 큰아버지가 장손역할을 하셨다.
미국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 보니 처음부터 그 분은 밖으로 도신 것 같고,
친척간에도 그 분에 대해 별로 말이 없다.
어쩌다 미국에서 전화오면 어색할 정도. 이제 그런 연락마저도 없다.


아마도 친척중에 나를 가장 생각해 주신 분이 큰아버지일거다.
말과 행동 모두에서 나는 그것을 확실히 느낀다.
그런 큰아버지가 올해 5월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작년 추석때, 뭔가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기골이 장대하고 호방하여 안 좋은 일이 생길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는 큰어머니의 상태가 심각하여 걱정했는데 큰어머니는 호전되고
오히려 큰아버지가 갑자기 위급하여 산소마스크로 연명하기에 이르렀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시기여서 돌아가시기 한달전쯤 찾아뵈었는데
의외로 내이름도 부르고 알아보신다.
당분간 이렇게 지리한 병상생활을 하시게 되나 보다 했는데
한달후쯤 유명을 달리하셨다.

큰아버지는 화장하여 대전현충원에 모셨다(국가유공자이다)

 

 

 

몇십년동안 우리 집안에서는 직계차원에서의 큰 조사가 없었다.
마지막인 할머니가 돌아가신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될 정도로
긴 기간동안 큰조사가 없어 이런 거에 거의 무심하게 지냈다.
그런데 우리 집안도 이제 시작인가 보다.


아버지는 장례단계마다 많이 우셨다.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상심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실때 이후 처음으로 본 아버지의 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아버지는 많이 약해지신 것 같다.
괜히 그런 모습을 보니 속이 상한다.


추석이 곧 다가온다. 처음으로 큰아버지 없는 추석이다.
큰 아버지댁에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다
(큰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시고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모른다)
몇십년동안 똑같이 해왔던 추석일정이 이제 어떻게 되려나?
아버지가 뭔가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이번 추석은 지금까지와 다른 풍경이, 나를 목매게 할 듯 싶다.


나이가 들면 아프고, 때가 되면 이별을 한다지만
막상 가까운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허망스럽다.
우리 집안도 이제 서서히 그 단계에 들어선듯하고
그러다 보면 나도 당사자가 될 것이다.
사는게 별게 아닌데, 살아도 특별히 좋은 것이 있는건 아닌데
그래도 사별은 늘 가슴 아프게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자의 비애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