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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생각

눈내리는 한밤중-어느새 사평역에 그들과 함께 머물다

리매진 2013. 2. 4. 01:36

 

오후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이 밤이 되니 더 많이 내린다.
오늘이 입춘이라는데, 며칠간 날이 따뜻해 이제 겨울도 다갔나 보다 했는데
이 밤 눈이 소록소록 내린다.


방금 베란다에서 밖을 보는데 참 눈이 얌전히도 조용히 내린다. 끊임없이..
도로에는 가끔씩 차가 지나다니고, 길가 가로등이 눈에 휘뿌옇게 빛나며,
아파트 단지내의 도로는 눈에 완전히 덮여 하얗기만 하다.


눈이 내리면 늘 생각나는 시-곽재구의 사평역에서.
겨울이면 늘 이 시가 머리를 맴돈다. 그게 거리이든, 야외이든, 차안에서든..
특히나 밤에 내리는 눈을 보면 이 시가 더 가슴을 흔든다

 

 

사평역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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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리는 날, 그냥 조용히 이 시를 속으로 읆조리면

선연한 풍경 하나가 지나간다.
시인이 봤던 사평역의 눈내리는 밤, 그 대합실의 풍경이 바로 그려진다.


처연하게 앉아있는 한 사람의 모습과 그 깊이를 알수없는 인생의 역정,
말 못하는 깊은 울음과 같은 사연,
그저 내리는 눈 바라보며  담배 한모금, 그 연기사이로
그리운 것 하나 붙잡고 인내하는 사람.


그 위로 눈은 내리고,

밤열차는 또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흐르듯 가버리는 겨울역의 대합실

-그속에 한줌의 눈물을 불빛속에 던져주는 사람.


그사람의 그리웠던 순간은 언제일까?

내면 깊숙히 가득한 할 말들은 무엇일까?
침묵하는 그 위로 송이송이 하얀 눈은 밤새 내렸나 보다.

 

 

눈오는 날 사연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있는 모든 곳은 어쩌면 사평역인지도 모른다.


내가 자정넘은 이시간 밖을 쳐다보며 담배를 피는 우리 아파트 20층 베란다도,
늦은 시간, 배회하다 내리는 눈을 쳐다보는 도심 어느 건물 처마 아래도,
어두운 밤,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망연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골 낮은 지붕아래 마루도,
이 밤 어둠을 뚫고 목적없이 어딘가를 가고 있는 야간버스도,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길가의 작은 벤치도.


지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을 침묵으로 대신하며
어쩌면 그들은, 그들만의 사평역 난로가에서
말없이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기다리는 기차는 언제나 올련지.
그리웠던 순간들과 기다리는 내일은, 저 내리는 눈이 그치면 과연 올련지.....


나와 그들의 사평역에는 모두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밤, 눈이 내리고 있다.
마치 말못할 사연을 덮어주듯, 위로하듯

 싸륵싸륵 이 밤 온천지에 눈꽃이 쌓이고 있다

 

 

사진은 한장 빼곤 다 송일곤감독의 영화 "꽃섬"의 스크린샷이다
꽃섬은 모든 슬픔과 불행을 다 잊을 수 있다는 꽃섬을 찾아가는 세 여자의 로드무비

-이 영화 안알려있지만 나름 수작이다. 뒷부분이 조금 지루하지만....

서사는 다르지만 영화속에서 그녀들의 아픔과 행로는

사평역에서의 서정과 너무나 닮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