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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배우 김여진

리매진 2011. 1. 25. 03:46

 

김여진-그사람의 처음 연기를 본 느낌은 참으로 자연스럽고 사실적이구나였다.
연기같지 않게 힘을 빼고 너스레 떨듯,
허세의 배우가 아닌 일상인들의 몸짓과 툭 던지는 말투는
아,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수도 있구나였다.

 

그런 배우 김여진 이 사람이 요즘 화제다.
그녀의 연기만큼 너스레를 떨듯 이 사회의 소외된 공간과 상황에
그녀의 방식으로 결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관심을 갖고 그녀의 블로그 등을 살펴보니 일순간의 이벤트가 아닌
소외된 이웃과 사회, 바른 삶에 대한 고민을 오래전부터 쭈욱 해온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헌신의 모습도 보이고...

배우로서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모습을 보여준 그녀가 아름답다

 

김여진 블로그 http://kimyeojin.tistory.com/ 

 

=====사회적 발언·봉사활동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함이죠-경향신문(2011년 1월 24일)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242121502&code=210100

 

 

해고된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을 돕고 있는 배우 김여진이 연예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것도 사회적 발언과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자신의 지명도나 학문적 성취 등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정·관계 고위직을 얻으려는 대학교수들을 일러 ‘폴리페서’라고 부른다. 널리 알려진 대로 ‘폴리페서’란 ‘정치(politics)’와 ‘교수(professor)’를 합친 ‘시사용어’이다. 또 정치에 참여하는 언론인들에게는 ‘정치’와 ‘언론인(journalist)’의 합성어인 ‘폴리널리스트(polinalist)’라는 별명이 붙는다.


연예인들의 정치권 진출이 잦아지면서 ‘정치’와 ‘연예인(엔터테이너·entertainer)’의 뜻을 합친 ‘폴리테이너(politainer)’란 말도 생겼다. 순박한 ‘양촌리 농부’에서 사진기자들을 향해 ‘찍지 마, XX!’ 등의 욕설을 퍼붓는 ‘실세 장관’으로 변신한 유인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인 쟁점이나 문제에 대해 적극 목소리를 내거나 직접 참여하는 연예인들은 ‘소셜테이너’라고 한다. ‘소셜테이너’는 연예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사회적 발언을 한다는 점에서, 또 그것에 대해 직간접적인 불이익도 감수한다는 점에서 ‘폴리테이너’와는 달리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된다.

 

학교 측에 의해 전격 해고된 홍익대 청소·경비노동자 170명의 농성 과정에서 또 한 사람의 소셜테이너가 태어났다.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 <박하사탕> <취화선>, TV 드라마 <대장금> <그들이 사는 세상> <이산> 등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배우 김여진(39)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청소노동자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이들을 돕기 위해 모여든 단체와 시민들을 향해서도 ‘외부세력’ 운운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는 이 대학 총학생회장에게 김여진은 블로그를 통해 “밥이나 먹자”고 오히려 위로했다. 그는 또 밑반찬을 싸들고 농성장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난 총학생회장이 청소노동자 아줌마들이 차려준 밥도 못 먹는 것을 보고는 “무엇이 너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라고 반문하면서 “총학생회 뒤에 숨어 있는” 학교 측에 사태해결을 위해 즉각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김여진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트친(트위터 친구)’들과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온라인 모임을 결성한 뒤 22일 오후에는 ‘홍대 노동자돕기 바자회’를 열고 인디밴드들과 함께 즉석 공연도 펼쳤다. 바자회 행사를 앞두고 있던 김여진을 그의 집이 있는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사회참여와 연기자로서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보았다.

 



김여진은 청소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열악한 상황에 대해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동국대·서울시의 청소노동자들이 곤란을 겪었을 때 트위터를 통해 이를 알리고, 직접 현장을 찾기도 했다. 이번 홍대 사태가 발생했을 때 ‘어머니들이 우리가 건넨 빵, 야쿠르트를 보면서 많이 우셨다’는 트친들의 메시지를 보고 최저임금 75만원의 월급과 300원의 점심값을 받고 일해 왔던 노동자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연예인의 사회 참여를 두고 ‘소셜테이너’ 등으로 과도하게 상찬하거나, ‘딴따라가 주제넘은 짓 한다’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그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연예인 이전에 대한민국 시민이자 헌법적 주권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표현의 자유를 누리려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청소노동자 지원활동이 다음달 개봉하는 영화 <아이들>의 사전 홍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 ‘됐거든’이란 말로 답변을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홍대 사태를 지켜보면서 김여진은 우리 사회의 작은 희망을 느꼈다고 한다. 트위터를 통해 만들어진 ‘날라리 외부세력’은 45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끼던 옷, 그릇, 책, CD 등을 바자회에 내놓고 10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모아 ‘홍익대 총장님, 같이 밥 한끼 먹읍시다’라는 제목의 신문 의견광고를 냈다. 또 콘서트, 한방진료, 노무·재무 상담, 손톱 손질, 사주관상 등 재능기부로 힘을 보탰다. ‘외부세력’의 헌신적 활동에 감동한 졸업생 동문들과 재학생들은 촛불집회로 이에 화답했다. 김여진은 “농성하는 당사자들은 힘들겠지만 시민들의 동참 물결로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며 “덕분에 트위터에서는 ‘김여진 사랑당(黨)’이라는 강력한 정당이 출범했다”고 자랑했다.

 

따지고 보면 김여진의 사회 참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4대강 사업 반대와 인도적 대북지원 활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의 4대강 공사에 대해 그는 “여울지고, 굽이치는 그 강줄기에서 사람을 비롯한 뭍생명이 어울려 살아간다”며 “이 강을 파헤치고 도려내는 것은 바로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김여진은 책을 무지무지 많이 읽는 소녀였다. 만화에서부터 소설에 이르기까지 활자로 된 것은 가리지 않고 읽었으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등 특히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의대에 가라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독문학과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강한 의지로써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 니나(<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의 영향도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니나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존재론적 진지함과 관념적 치열함의 소유자인 데 반해 나는 지극히 감성적인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에는 에밀 싱클레어(<데미안>의 주인공)도, 니나도 보이지 않았고, 강의는 고교 때의 수업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곧바로 학생운동으로 눈을 돌렸다. ‘민중연대학생회의’의 멤버가 된 그는 특히 동년배 대학생이었던 강경대·김귀정이 경찰의 쇠파이프와 최루탄에 목숨을 잃자 분노에 사로잡혀 가두투쟁에 나섰다. 서울 전농동·청량리 등에서는 ‘빈활(빈민지원활동)’도 열심히 했다. 철거촌에서 활동하던 어느날 용역깡패와 경찰이 들이닥쳤고, 그는 저항 한번 못하고 동대문서로 끌려가면서 무수하게 얻어 맞았다. 나중에 기소유예로 처리되긴 했지만 그가 기소될 때 적용된 죄목은 ‘폭력’이었다. 그가 첫사랑을 만난 것도 운동을 통해서였다. ‘첫 사랑’은 구속된 뒤 1년간 실형을 살다가 군대에 끌려갔고, 결국 헤어졌다. 지금도 소식을 듣느냐, 헤어진 뒤에도 만난 적이 있느냐 등의 호사가적 질문에 김여진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얼마전 우연히 듣게 됐다”며 “남편(MBC 김진민 PD) 때문에 더이상의 언급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4학년때 김여진은 학생운동 대오에서 빠져 나왔다. 선후배간 엄격한 위계질서와 같은 남성중심 문화, 날선 노선투쟁 등에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지만 “분노와 증오는 어떤 일의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노래하고, 춤추고, 연애하는 것을 좋아하는 ‘날라리’였는데 운동권 문화는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김여진은 “운동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았다”며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고는 많은 사람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대학졸업 후 모교 여성학대학원 시험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1995년 대학로에서 연극 한 편을 운명처럼 만나게 됐다. 연극에 반한 그는 바로 극단(봉원패)에 ‘한달간 포스터를 붙여 주겠다’며 입단했고, 주연배우의 사정으로 그 작품으로 데뷔했다. 연기자 김여진의 출발을 알린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초등학교 때 성당에서 열린 성극(聖劇) 이후 무대에 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1년 뒤에는 연우무대로 옮겨 혹독한 담금질로 배우로서의 기본을 다졌다. 김여진은 “당시 배우가 천직이라는 느낌은 없었지만 연극이 너무나 재미있어 머릿속에는 온통 연극뿐이었다”고 말했다.

 

김여진은 98년 10월 개봉된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영화에 데뷔했다. 어느날 연우무대를 찾은 임 감독은 <마술가게>라는 연극에 출연 중이던 김여진을 눈여겨 본 뒤 즉각 시나리오를 건넸고, 김여진은 강수연·진희경과 함께 주연을 맡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각기 다른 성격과 직업을 가진 세 여성을 통해 변화된 현대 여성의 성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흥행에 성공했고, 전라(全裸)의 열연을 펼친 김여진은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이듬해 김여진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의 아내 홍자역을 맡아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았다. 김여진은 “<박하사탕>의 경우 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며 “지금도 감독님과는 가끔 연락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세례명 크리스티나)인 김여진이 불교와 인연을 맺고, 북한어린이 돕기 등 대북지원활동에 적극 뛰어들게 된 것은 법륜 스님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그는 2006년 스님이 운영하는 <깨달음의 장>이라는 4박5일간의 수련강좌에 참가했다. 스님의 가르침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서 살아라’는 것과, ‘사람들의 아픔은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동료 연기자 안재환·최진실의 죽음도 계기가 됐다. 그는 “두 사람의 자살과 북한 동포들의 아사(餓死)는 경우는 다르지만 결국은 너무 아팠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김여진은 1년간의 불교대학 과정을 거친 끝에 2009년 12월 법륜 스님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보명화(普明華)라는 법명도 얻었다. 그는 “개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가톨릭의 영성(靈性)과 불교의 불성(佛性)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두 종교가 나의 자아 속에서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여진은 법륜 스님이 세운 기아·질병·문맹퇴치 시민단체 JTS(Join Together Society)의 사회공헌팀장으로서 봉사활동의 일선에 나섰다. MBC 드라마 <이산>이 방영되고 있던 2007년 말 김여진은 출연진과 함께 북한어린이 돕기 모금함을 들고 명동으로 나갔다. 그때 주연인 한지민의 모금함은 금방 돈이 채워지는데, ‘비중있는 조연’인 김여진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김여진은 “어느 순간 성금을 넣는 시민들에게 감사하기보다는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가’에만 신경을 쓰는 나 자신을 바라보다 숨이 막혔다”고 말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그는 그때부터 진심을 담아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우렁차게 외치기 시작했다.

 

김여진은 2008년 12월과 2009년 12월 각각 1개월 동안 인도에 머물렀다. 불가촉천민들의 빈민촌 둥게스와리에서 JTS 대학생 단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그는 최빈민촌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한 카미르라는 여자의 집을 찾았다. 카미르의 얼굴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 고단함의 흔적을 발견한 김여진은 그녀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서로의 체온이 전해지자 카미르의 마른 눈에는 곧바로 눈물이 흘렀고, 김여진도 따라서 울었다. 그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갔고, 서로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진심어린 봉사활동 덕분에 김여진은 ‘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오라’는 ‘따뜻하고도 파격적인’ 제의를 받았다. 그는 ‘둥게스와리 최고 꽃미남’이란 말에 아주 짧은 순간 흔들리기도 했지만 “정실(正室)도 아닌 데다 졸지에 홀아비 아닌 홀아비가 될 남편이 떠올라 정중히 거절했다”고 말했다.

 

김여진을 이해하는 열쇳말은 ‘행복’이다. 그가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것도, 사회적 발언과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결국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블로그 이름도 ‘무조건 행복’이다. 그는 “내가 행복해야 무엇이든 오래 잘할 수 있고, 힘이 남아돈다”며 “그렇게 되면 좋은 세상을 만들거나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힘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연기나 사회활동 외에 그는 △매일 아침 커피를 갈면서 그것에 맞는 음악을 듣는 것 △체육관에서 수영하는 것 △여러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에너지를 나누는 것 △멋진 사람을 만나 섬세한 대화를 나누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김여진이 죽기 전까지 꼭 누리고 싶은 행복은 “휴전선이 무너져 DMZ에서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과 같은 축제가 열리고,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남북을 누빌 때 이를 24시간 종일 TV방송으로 시청하는 것”과 “젊은 친구들과 함께 북한지역을 돌면서 센서스작업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장르의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으며 연기가 넓고 깊고도 섬세한 중국배우 양조위와 함께 출연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김여진은 총총걸음으로 카페를 빠져 나갔다. 홍대 농성장 바자회 준비모임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김여진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몇 가지 질문이 뇌리에 떠올랐다. 나는 과연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독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폴리널리스트’야 능력도 기회도 없어 되지 못했지만, ‘소시널리스트’에는 가까이 가고 있는가.


■ 연기자 김여진
배역에 무섭게 몰입하는 원동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

 

 

모든 배우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이지만 김여진도 누구 못지않게 몰입이 빠른 편이다. 그는 1999년 영화 <박하사탕>에서 첫날밤 남편(설경구)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순수한 모습에서 조금씩 일그러지는 ‘한국의 보편적인 여인상’을 연기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다 매맞는 장면에서 좁은 방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연기는 설경구보다 훨씬 진짜처럼 보였다”고 평가했다. 2002년 개봉된 <취화선>에서 그는 주인공 장승업(최민식)의 연인인 기생 진홍역을 맡았는데 임권택 감독의 사인이 나자 대사를 외운 뒤 흥을 참지 못해 임 감독의 멱살을 잡은 채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봉변’을 당한 임 감독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08년 KBS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그사세)에서 김여진은 드라마 작가 이서우 역을 맡아 마치 대본을 쓴 작가가 직접 작품 속으로 파고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서우는 <그사세>를 쓴 작가 노희경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투영한 캐릭터였고, 이 때문에 김여진은 노희경의 페르소나로 불리게 됐다.

 

연극, 영화, TV드라마 등을 통틀어 김여진이 가장 몰입한 배역은 MBC 드라마 <이산>의 정순왕후(사진)였다. 2년이라는 방영기간도 길었고,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순왕후의 강렬한 권력의지와 무서운 간계(奸計)를 드러내 보였다. 김여진은 “힘들었던 만큼 보람도 컸고 기억에도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연기에 조금이라도 매너리즘이 생기면 새로 연기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해외연수를 하기도 한다. 그는 2006년에 4개월, 2007년에 1개월 동안 미국 뉴욕 ‘맨해튼 HB 스튜디오’에서 연기수업을 받았다.

 

그에게 연기란 ‘공감 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 슬픔, 외로움, 두려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표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타고난 것이지만 후천적 노력으로 더욱 발달한다고 한다. 김여진은 “이것이 배우에게는 축복이자 천형(天刑)”이라고 말했다. 특히 연기자로서의 공감 능력을 투사할 몰입대상이 없을 때 연애, 쇼핑 등 ‘몰입중독’에 빠지기도 하며, 심한 우울증에 빠지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김여진은 연기를 통해 삶의 반려자를 구했다. 2003년 3월 MBC 주말연속극 <죽도록 사랑해>에서 연기자와 조연출로 처음 만난 뒤 2004년 2월 결혼했다. 김여진-김진민 커플은 이후에도 <그 남자가 수상하다> <신돈> <로드 넘버원> 등에서 호흡을 맞추며 부창부수를 과시했다.

 

■ 김여진 약력

△ 1972년 경남 마산 출생
△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 연극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러브레터> <엄마를 부탁해> 외 다수
△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 <박하사탕> <채식주의자> <취화선> 외 다수
△ 드라마 <대장금> <이산> <사랑한다 웬수야> <그들이 사는 세상> 외 다수
△ 1998년 청룡영화상·춘사영화제 신인상 수상
△ 2000년 대종상 여우조연상 수상

 

=========================<2011년 6월 19일 추가>==========================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현지를 방문한 김여진이 이슈가 되면서
별 찌질한 놈들이 그녀를 폄하하며 달라붙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찌질한 놈들의 잉여짓꺼릴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김여진이 그리 만만하지 않을건데 하는 것이었다.
여자고, 배우고 하니 어찌 만만히 보고 쥐새끼들처럼 살살 곡해하며 손상을 줄려고 병신짓꺼리들을 하는 모양인데
그녀 김여진 역시나 눈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상대를 잘못 고른듯...


그녀는 그 정도에 넘어갈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아는데
오늘도 어쩧게든 깍아내리려 하는 이상한 놈들의 찌질한 짓꺼리들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러는 당신은 어려운 사람들의 구조신호에 답한 적이 있는가?

 

한진중공업 고공크레인에 있는 김진숙에게 손을 내민 김여진과의 인연을
김진숙은  이렇게 말한다

 

■ 바다를 찾아온 육지의 사람-한겨레21(2011.06.13 제864호)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9767.html

[특집] 고공농성 140일째, 한진중공업 김진숙 위원의 글…
-필사적인 깃발을 알아봐준 김여진 등 보고 싶은 천사들이여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 쓰라면 나는 다만 한 줄도 쓸 게 없다.
천사의 신원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땅에서 발을 뗀 지 140일째(5월25일 현재)
난 등대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육지에서 두 발 딛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싶을 등대의 욕망도 이해한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트위터가 없었다면 난 언어를 잃었을 것이다.
인간이 습득한 문명이란 게 얼마나 허약한지를 징역 독방에서 난 이미 체득한 경험이 있다.
이 폐절된 공간에서 퇴화를 지연시키는 유일한 도구가 트위터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을 붙잡고 나는 세상을 향해 맹렬히 구조 신호를 보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 웃으며 등장한 몹시 무모한 배우

 

난파선의 필사적인 깃발을 용케 알아본 사람, 김여진.
“어, 내가 보고 싶은 분, 거기 괜찮은가요?”
내가 기억하는 첫 접선, 그렇게 우리는 조우했다.
그녀는 육지에서, 나는 바다에서.
그녀가 배우였음을 알고, 연속극도 안 보고 살던 삶이 꼭 옳은 게 아닐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회의했다.
단 한 번도 마주 앉아 얘기 나눠본 적 없는 사람에게서의 아프고 질긴 공감.
희망에 대한 유대감.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파업농성장엘 왔다. 배우에겐 몹시 무모한 일이다.


그 무렵 공장은 음산했다.
파업은 석 달을 넘어가는데 교섭은 봉쇄되고, 회사 쪽의 고소·고발, 징계, 손배·가압류로 질식해가던 조합원들이
숨 쉬고 살겠다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장엔 남은 자들의 탄식으로 크레인에 녹이 슬고 있었다.
남겨진 자에게도 떠나는 자에게도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시간들.
가스불 끄는 걸 잊은 냄비 속의 고등어조림처럼 온몸의 핏줄이 자작자작 타들어가던 초조함.
이런 공장에 웃으면서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더군다나 이 85크레인은 죽음이 전제된 공간이다.


그러나 과연 날라리들이었다.
노란 개나리들처럼 몰려와서는 수학여행 온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고 사인해주고, 사진 찍고,
공장 안에서 거친 사내들이 성긴 손으로 차려내는 저녁을 먹고, 그리고 갔다.
그뿐이었다. 집회도 없었고 발언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날 모처럼 조합원들에게서 물 오른 버들강아지 같은 생기가 돌았다.
 
우리도 웃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울려 웃고 나니 가장 큰 고비를 넘어서 있었다.
그녀가 홍익대 청소노동자의 투쟁에 함께 했던 일보다, 더 내 마음을 울린 건

그녀와 함께 인도에 봉사활동을 갔던 젊은이가 트위터에 올린 글과 사진이었다.
불가촉천민.

그 남루하고 허물어지고 가난의 주름이 파도치는 노파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고 울먹이던 사람.
아! 내가 인도 여행에서 하루에 1천 명도 넘게 봤던 사람들.
1루피를 구걸하며 날파리처럼 엉겨붙던 그들에게 동전을 에프킬라 뿌리듯 던져주며
파리를 떨쳐냈던 위선의 기억이 나는 오래도록 괴로웠다.


그녀가 저토록 빛나는 건 사심 없는 진정성의 힘이다.
자신의 영혼을 너른 들판에 풀어놓곤, 질주를 하든 자갈밭을 디디든 붙잡지도 돌려세우지도 않는 사람.
그 봄바람 같은 자유의지에 많은 이가 공명하는 건, 다들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들판으로 나가기 위해선 얼마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 아닐까.